잡동사니

밑거나 말거나

바기누 2005. 8. 26. 00:41

박철언 5-6共비화 회고록

▽전두환(全斗煥),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죽여라”=1988년 5공을 향한 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1월 8일 연희동 자택에서 만난 전 전(前) 대통령은 분노했다. “내가 무리해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는데 사과하고 재산 헌납하고 낙향하라고 하는 것은 죽어 달라고 하는 것보다 더한 짓이다. 차라리 암살범을 시켜 후임자가 선임자를 죽이는 것이 깨끗하다.”

 

전 전 대통령은 “이제는 나도 싹 쓸어버리겠어. 나도 양심선언 하겠어. 김대중(金大中)이가 잡든, 김영삼(金泳三)이가 잡든…”이라며 “형님(전기환 씨)이나 처남(이창석 씨)까지 잡아넣겠다는 것은…. 노태우가 말 한마디 없이 그런 식으로 하면 나한테 귀싸대기 맞는다. 둘 사이가 원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사흘 뒤 전 전 대통령은 나를 연희동으로 불러 “대선 때 정치자금은 25명으로부터 1010억 원을 걷었으나 실제 (쓴) 자금은 두 배 이상 들었다. 약속한 금액과 실제 헌금 명단이 있다. 그 이전에는 따로 받은 것이 없다”고 했다.

 

전 전 대통령은 또 노 대통령과 통화(11월 2일)했다며 그 내용을 전했다. “이원조(李源祚·전 은행감독원장)는 내가 많이 걷고 적게 내놓은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A 그룹 같은 데는 50억 원을 약속하고도 10억 원만 냈다. 확인해 봐라. 삼족(三族)을 멸하는 식으로 하니 견딜 수가 없다.”

 

11월 15일 노 대통령이 전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알려줬다.

“최병렬(崔秉烈)이 ‘1000억 원을 인계해 주고 나머지가 있을 테니 내놓으라’고 한다는데 환장할 일이다”(전), “살신성인하면 뒤는 내가 보장한다. 나를 믿으라”(노), “나중에 만날 때 술이나 한잔 주라”(전).

 

▽“DJ는 믿을 수 없다”, “YS는 늙었다”=1988년 9월 21일 상도동 자택에서 나는 YS와 독대했다. YS는 “노 대통령에게 신뢰의 감정을 느낀다”며 “DJ는 믿을 수 없고 좌경화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1989년 1월 17일 연두기자회견 후 나를 불러 “DJ를 만나 ‘영호남이 합쳐지면 당신은 영웅이 된다. 극단적으로 나가면 지역 당수에 불과하다’고 유도하라”고 지시했다.

다음 날 동교동 지하 서재에서 DJ와 만나 3시간가량 대화를 나눴다. DJ는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서 지금도 도청을 하고 편지를 검열하고 있다. 안기부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내가 YS보다 건강하다. YS는 운동을 너무 많이 해 늙는 것 같다. 내가 만 65세지만 대통령을 한 텀(임기)은 할 수 있는 건강이다”라고 의미 있는 한마디를 던지기도 했다.

 

▽중간평가 1500억 원 모금 시도=1989년 3월 10일 대그룹 모 회장이 급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3월 8일 5대 그룹 총수를 비롯해 재계 인사 8명이 청와대 만찬 행사를 마치고 살롱 ‘반줄’로 옮겨 술을 한잔 했다. 그 자리에서 ‘안기부 주관으로 롯데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 비용으로) 1500억 원을 모금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내게 귀띔해 줬다.

다음 날 이를 보고하니 노 대통령은 “자네가 어떻게 그 일을 아느냐”며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 공약은 3당(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합당과 함께 물 건너갔다.

 

▽“문익환(文益煥) 목사의 방북은 DJ 작품 의심?”=1989년 3월 25일 문 목사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면서 공안정국이 시작됐다. YS 측의 황병태(黃秉泰) 의원은 “문 목사가 DJ를 만나고 전격적으로 방북을 결정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황 의원은 “3월 20일 YS는 출타하려다 비서실에 대기 중인 유원호(당시 통일민주당 당원으로, 문 목사와 함께 방북했던 사람)에게서 ‘문 목사가 방북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알았다’고만 답변했다”며 YS와의 무관함을 거듭 강조했다. 김덕룡(金德龍) 의원도 “YS는 그 얘기를 건성으로 듣고는 혹시 DJ 측의 공작이 아닌지 의심했다”고 말했다.

 

▽“JP는 체면만 세워주는 방향으로 해라”=1989년 3월 4일 노 대통령은 내게 “만약 YS가 차기 대권에 관심이 있으면 여당으로 들어와 기반을 닦고 대권을 쥘 길을 뚫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 이미 노 대통령에게서 “신격호(辛格浩) 롯데그룹 회장과 YS는 오래전부터 가까운 사이다. 신 회장을 자주 만나 올바른 정보도 파악하고 YS에게 합당을 권유하라고 부탁하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7월 18일 롯데호텔 일식당에서 만난 신 회장은 “YS의 합당 의사는 분명하다. 그 전제로 정호용(鄭鎬溶) 이원조의 용퇴를 주장하고 있다”며 “내각제 개헌을 통해 YS가 수상(총리), JP가 대통령을 하고 그 다음에는 민정당이 해야 한다”고 했다.

3당 합당은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노 대통령은 9월 27일 박준규(朴浚圭) 민정당 대표 등과의 청와대 만찬에서 “2년 정도는 양 김씨에게 수상이 될 찬스를 주고 그 다음에 순수 민간인에게 국정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또 10월 3일 박 대표 등과의 오찬에서 “JP는 꼭 집권하겠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으니 체면만 세워 주는 방향으로 해라. YS는 꼭 집권하겠다고 하는데 ‘시간을 끌면 너는 아무것도 안 된다. 불안한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JP와 손잡을 수밖에 없다. JP에게 다 주겠다. 그러면 YS 너는 꼴찌가 될 것이다’라고 승부수를 던질 시점이다. YS가 DJ와 손잡을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1989년 10월 15일 상도동 자택에서 YS를 만났다. 그는 민주당 내 야권통합 움직임이 신경 쓰이는지 “최형우(崔炯佑) 장석화(張石和)는 몹쓸 인간이다. 두 사람 외에는 반대 세력이 없고 노무현 의원은 당을 떠나도 무관하다”고 잘라 말했다.

 

▽노(老) 총리의 눈물=1989년 10월 21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전날 귀국한 노 대통령이 청와대 고위당정회의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귀로에 신문을 보니 3김씨가 정권 퇴진 운운하며 악수하는 무의미한 사진이 톱이었다. 대통령 할 생각이 없어지더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이에 강영훈(姜英勳) 총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외국에서 밤잠 설치며 나라의 영광을 위해 일하시는데 송구스럽다”고 했고, 박 대표도 울먹이며 “연말까지 당이 책임지고 5공문제를 종결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철언(朴哲彦) 전 의원의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5공, 6공, 3김 시대의 정치 비사’ 후반부의 주요 내용을 13일자(6면), 15일자(7면)에 이어 계속 소개한다. 이 회고록은 박 전 의원의 주관적 서술임을 거듭 밝혀둔다.》

 

▽“한번 모험해 봐라”=1988년 11월 29일 6공 특사로서의 첫 평양 비밀 출장을 앞두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노 대통령은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비디오를 보니 북한 침투요원의 충성심이 잘 드러나 있더라.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라.

 또 우리의 내부 상황에 대해 오판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해라.

 정 뭣하면 북측에 ‘모험해보지 왜’라고 한번쯤 염장을 질러라”고 당부했다.

나는 노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하고 적십자 깃발을 단 그랜저 승용차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11월 30일부터 12월 2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의지를 전했다.

회담 도중 분위기를 식힐 겸해서 나는 “예전에 북측이 동해안으로 심심치 않게 공작선을 내려 보내 우리의 군사기지를 정찰하곤 했는데, 앞으로 그런 일이 있으면 서로 간에 신뢰가 깨질 수 있다”고 뼈있게 짚었다.

그러자 한시해(韓時海) 북한 대표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남측은 U-2기, SR-71, 첩보위성 등으로 평양 시내를 손금 보듯 하고 있지 않나. 우리가 하는 것이라곤 고작 사진 몇 장 찍어오는 것이다”고 대꾸해 나도 피식 웃고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 “10만 달러 지원할까?”=1989년 1월 26일 싱가포르의 한 호텔 수영장에서 한시해 대표와 비밀 접촉을 가졌다. 한 대표가 느닷없이 “박 대표(저자)가 정치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여러 측면에서 뒷받침해 줄 수 있다. 이번에 10만 달러 정도 지원해 줄 수 있는데 어떠냐”고 물었다.

마음속으로 ‘아니, 이 양반 돌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의는 고맙지만 민족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돈 얘기는 피차 자제하는 게 좋겠다”며 정색하며 응수했다.

전두환(全斗煥) 정권 중반기인 1985년 7월부터 노태우 정권 후반기인 1991년 12월까지 나와 북측 한 대표와의 남북 비밀회담은 42차례 있었다.

나는 ‘88계획-남북 간의 평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비밀접촉 백서’라는 제목의 세 권의 책을 각 50부 비밀리에 만들어 대통령 등 8명에게 돌리고 나머지 42부는 안기부 비밀창고에 보관시켰다.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금강산 개발=1988년 10월 4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만난 정주영 현대 회장이 “철원과 속초에서 금강산을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할 생각이다”며 처음으로 금강산 개발 계획을 밝혔다.

12월 7일에 다시 만난 정 회장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만날 예정이라며 “금강산을 관광특구로 만들어 속초에서 금강산을 갈 수 있게 하고 철원∼내금강∼외금강을 연결할 것이다. 장차 강원 통천(정주영 고향)에 자동차 부속품 공장도 설립할 것이다”며 구체적인 청사진을 알려줬다.

1989년 2월 2일 귀국한 정 회장은 북측과의 교섭 내용을 전하며 “시계 200개, 트럭, 불도저, 지게차, 김정일(金正日) 비서와 허담(許錟) 앞으로 그랜저 승용차를 전달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 회장이 북한에서 ‘위대한 김일성 장군님’이라고 호칭하는 장면이 전국에 방영보도되고 국가보안법 위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금강산 관광 개발은 엄청난 태풍에 부닥쳤다.

 

▽“내각제 없던 일로 하자”=1990년 3월 2일 김영삼(金泳三) 민주자유당 최고위원의 차남인 김현철(金賢哲)의 서울 신반포아파트에서 YS를 만나자 포도주를 한 잔 따라서 권하더니 “골치 아픈 내각제는 집어치웁시다”라며 말을 꺼냈다.

“평민당도 반대하고…. 지금 이걸 추진하면 국민들도 들고일어난다. 이번에 나를 화끈하게 도와주면 수월하게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 대통령을 5년밖에 더 하느냐. 민주계에 특별한 사람도 없고, 대통령도 박 장관(저자·당시 정무장관)을 아끼니까. 서로 합심하여 키워줄 수 있는 것 아니겠소.”

그러나 나는 “반드시 내각제를 해야 한다”고 맞섰고 YS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내각제는 된다. YS가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대통령으로 결코 밀지 않겠다”고 했고, 5월 7일에는 YS를 압박해 내각제 합의 각서까지 받았으나 공개하지는 못했다.

 

▽노 대통령, “YS는 신의 있는 사람”=1991년 12월경 노 대통령은 내게 “대안은 YS밖에 없으니 그를 적극 밀어라”고 몇 차례 지시했다.

내가 중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밀 수 없다고 하자 노 대통령은 “YS는 신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 의리 갖고 한평생 정치한 사람이다”며 거듭 YS 지지를 종용했다.

1992년 4월 19일 김복동(金復東) 의원을 만났더니 “노 대통령이 4월 8일 YS에게 대권을 주기로 최종 결정하고 다음 날 (주례회동에서) YS에게 정식 통고했더니 마룻바닥에서 큰절을 했다고 각하(노 대통령)가 얘기하더라”고 했다.

내가 계속 YS에게 적대적 태도를 보이자 그해 5월 26일 청와대 인근 삼청동 안가에서 만난 영부인 김옥숙(金玉淑) 여사는 “어려운 시점이니 도와 달라. 각하를 만나 달라. YS와도 만나는 데 응해달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호소했다. 김 여사는 또 7월 16일 아내를 청와대로 불러 “선거 후에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YS를 지원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노태우 새 인간으로 돌아와야”=1994년 10월 7일 연희동에서 전 전 대통령 내외를 만났는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앙금이 여전했다. 전 전 대통령은 “노태우는 평생에 둘도 없는 친구인데, 옛날로 돌아가려면 노태우가 새 인간으로 돌아와야 한다. 6공 초기에 내 가족에 대한 박해는 모든 것이 노태우 한 사람의 책임이다. 참모가 어떤 건의를 했다 하더라도…”라고 했다.

내가 노 전 대통령을 적극 변호했으나 전 전 대통령은 “내가 노태우에게 전화를 걸어 (도청과 동향 감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니 노태우는 ‘쓰레기 같은 사람들이 (연희동을) 찾아다녀 보호하기 위해 도청하고 차단했다’고 하는데 그럴 수 있느냐”며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DJ, 천주님 맹세?=1996년 11월 16일 국민회의 김대중(金大中) 총재와 힐튼호텔에서 만났다.

DJ는 신한국당 차기 대권주자에 대해 “김덕룡(金德龍)은 김현철과 사이가 나쁘니 가능성이 없고, 나는 이수성(李壽成) 국무총리를 주목하고 있다”고 했다. DJ는 이어 “박 의원은 후배지만 큰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천주님께 맹세코 약속을 지키겠다. 박 의원같이 경륜을 갖추고 용기 있고 판단력이 탁월한 사람이 장차 나라를 맡아가야 한다”며 지지를 요청했다.